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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정책의 형성과정에 미치는 여론의 역할에 관하여 신뢰할 만한 지식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여론과 외교정책의 인과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여론-정책 간의 연결고리가 되는 직접적이고 실증적인 단서를 발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국가에서 외교정책 결정 과정에서 국내 여론의 역할을 찾기는 쉽지 않으며, 중국과 같은 비민주주의 국가에서 그 역할을 찾기란 더욱 어려운 작업이다. 중국은 국내 여론이 정책 결정(특히 외교정책)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정책 결정 과정에서 국내 여론이 갖는 상대적 중요성은 증대되어 왔다. 첫째, 개혁개방의 과정에서 국내 여론을 주도하는 엘리트 집단의 층이 두터워졌다. 개혁개방 이전에는 외교정책을 주도하는 소수의 엘리트가 정책 결정의 여론을 형성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정책 결정 엘리트, 전문가집단, 지식인 등이 광범위한 층을 형성하고, 독자층을 가진 대중매체에 의식적인 기고 혹은 저술 활동을 통해 외교적 현안에 대한 의사 표현을 상대적으로 활발히 개진한다. 환경, 무역, 금융, 군축 등 다양한 국제기구의 참여와 활동은 이 분야의 전문가를 필요로 했고,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여론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여론 주도층에 대한 중요성을 느낀 외사 영도 소조는 1998년 전문가집단에 대한 리스트를 요청한 바가 있으며, 장쩌민은 25명의 전직 대사들로 이루어진 자문그룹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조치는 이들의 전문적인 식견을 활용하려는 차원이었지만, 이들이 외교정책에 대한 국내 담론 생산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은 이들의 영향력이 증가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둘째, 국내 여론의 중요성은 중국 정부 혹은 공산당 핵심 서클의 지도자들이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여론의 향배에 주의를 기울이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이들이 많은 고정 시청자를 가진 텔레비전의 시사 프로그램을 보거나, 논란을 야기하는 간행물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대중의 정서를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대중의 여론에 관심을 갖는 것은 국내 정치의 안정을 중시하기 때문인데, 국유기업의 대량 해고와 실업문제가 갖는 사회적 불안과 정치적 폭발성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고 보수적인 경제정책으로 선회하기도 한다. 중국의 WTO 가입 과정에서 드러났던 경제적 세계화에 저항하는 듯한 중국 정부의 보호주의적 태도는 국내 여론을 의식하는 상황의 일례이다. 따라서 여론조사기법이 1970년대 후반 도입되었을 때, 부르주아 사회과학의 일부로 인식되었지만, 현재는 다양한 방법의 여론조사기법이 다양한 주제로 시행되고 발전되었다. 셋째, 국내 여론이 대중들에 의해 표출되는 가장 중요한 방식 중의 하나는 민족주의를 통해서이다. 민족주의는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를 경험한 제3세계 국가의 국가 형성과정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중국 민족주의는 전통적인 중화주의와 결합하여 서구와 일본의 침탈에 대한 치욕을 극복하여 중화 문명의 강대국을 재건하려는 열망과 결합 되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혁명과 문화대혁명이나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도 부국강병이라는 전통적인 민족주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아울러 중국의 민족주의 열망은 시진핑이 직접 '중국의 꿈 용어를 직접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의 민족주의는 강대국화 과정에서 일본의 군국주의나 독일의 파시즘처럼 대외팽창적인 진화할 수도 있으며, 공산주의 이념을 대체하여 대내적인 정치적 동의를 확보하는 이데올로기로 인식되고 있다. 개혁개방의 성공 과정에서 고무되는 중국의 민족감정은 광범위하게 읽히는 대중매체 물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1996년에 출판된 '중국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中國可以說不)'는 당시 중국의 2000년 올림픽 유치 실패, WTO 가입 문제, 이등휘의 미국방문과 대만 문제, 티베트에 대한 미국 지원 등과 관련하여 미국 음모론을 제기하였는데, 대중들의 민족감정을 자극하여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외에도 1990년대에서 현재까지 중국의 대중문화에서 민족감정을 자극하여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사례는 매우 많은데, 이러한 대중 매체물은 중국의 민족주의를 한층 고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일련의 매체물 중에는 서구의 문화를 수용하는 자유주의적 흐름을 정치적으로 비판하는 보수적 경향의 흐름이 존재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개혁개방 이후 서구의 모든 문화를 조건 없이 수용하는 과정에서 천안문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서구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고 중국적인 것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보수주의적 경향은 북경대학에서 전통문화 연구소 신설과 학술지 발간,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의 공자 사당 복원 등 유교에 대한 새로운 학문적 · 상업적 조명을 하는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민족주의는 직접적으로 중국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주는 국내 여론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중국인에게 쉽게 연상되는 남경대학살 혹은 중일전쟁 등 일본에 대한 잔혹한 이미지는 중국 정부가 대일본 외교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디 아오 위(혹은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영토분쟁이 발생하였을 때, 중국 정부는 수위를 넘어서는 학생들의 시위를 통제하는 노력을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왜냐하면 정부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정치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이며, 외교적인 채널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필요성 때문이다. 미·중 관계 역시 민족주의적 대중여론의 영향을 받는 영역이다. 미·중 관계는 중국의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통한 강대국화와 안보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시되는 외교적 현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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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정책 결정 과정에서 엘리트들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인식이 큰 영향을 끼쳐왔다는 사실은 외교정책 요인의 중요한 주제였다. 정책결정자들의 생각, 사고, 신념 체계 및 이데올로기 - 단순하고 직관에 의한 것이든 혹은 복잡하고 체계적이든 - 는 주어진 상황에서 정책결정자의 선택을 초래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대 중국의 공산당 지도자들의 국제정세와 외교정책 인식을 형성했던 주요한 기반은 마르크스(Karl Marx)-레닌(Vladimir Lenin)-마오쩌둥 사상이었다. 일례로 마오쩌둥 시대 외교정책 결정자들이 국제정치 체제를 보는 기본적인 시각은 세계를 3대 진영(자본주의 진영, 사회주의 진영, 제3세계 진영)으로 구분하는 '3개 세계론'이었고, 1960년대 사회주의 진영 내 중소분쟁의 이면에는 마오쩌둥의 공산혁명에 대한 사상이 배경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8년 이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은 혁명 1. 2세대와는 다른 성격의 엘리트 그룹을 형성하였고, 현재 중국의 외교정책은 장쩌민과 주롱지(朱鎔基)로 대표되는 제3세대를 거쳐 후진타오와 원자바오(溫)의 제4세대 그리고 시진핑의 제5세대 엘리트들이 주도하고 있다. 2002년 제16기 중국공산당 전국 대표대회와 2003년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통해서 등장한 중국 제4세대와 제5세대 엘리트 그룹의 외교정책에 대한 인식은 이전 세대와는 상대적인 의미에서보다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 특징져진다. 일반적으로 이 새로운 세대의 엘리트 그룹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전 세대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평가되는데, 첫째, 개혁개방 성과의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이들은 보다 실용적이라 평가되고 있다. 전문적인 과학기술 지식을 배경으로 자신들의 경력을 쌓아온 점에서 제3세대와 같은 테크노크라트들(technocrat)이지만, 제4세대 그룹은 1941~1956년 사이에 태어나서 1966~1976년 기간의 문화대혁명의 폐해를 직간접으로 경험했으므로, 급진적인 대중운동과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문화대혁명 기간 간쑤성(甘肅省)으로 하방(下放)된 경험을 갖고 있다. 둘째, 문화대혁명 기간의 고된 육체적인 경험과 변화하는 사회정치적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 경험은 제4세대 지도자가 탁월한 정치적 능력을 갖추게 단련시켰다. 5세대 지도자들은 문화대혁명을 직접 체험하지는 않았지만, 유년기에 이러한 역사를 간접적으로 경험한 바가 있다. 이러한 경험은 덩샤오핑 이후 정치적 구심점 없이 합의에 의한 집단지도체제를 택하고 있는 중국정치 체제에 잘 적용되는데, 정치과정을 공유하고, 협상하며, 자문하는 일련의 합의구축 과정에 순응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미수(秘書)의 정치적 경력을 쌓거나 '타이츠(太子黨)' 출신의 제4세대 지도자들은 권력 정치과정에서 협상과 타협을 통해 제휴를 구축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셋째, 특정 정파가 정치권력을 독점할 수 없는 집단지도체제는 권력의 분산과 협의의 통치를 통해 중국정치 과정의 제도화와 엘리트 민주주의를 더욱 촉진할 것이다. 개혁개방 성과의 이면에 있는 중국 사회의 양극화(도농 간, 지역 간, 계층 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법률과 제도에 의한 통치를 지속해서 확대할 것이며, 이러한 정치개혁이 곧 서구의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보다 투명하고 민주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라 예견된다. 외교정책과 관련해서는 제4, 5세대 엘리트 그룹의 중국 주변 지역 및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과 국가이익의 정의가 중요한 문제이다. 장쩌민의 제3세대 그룹은 천안문사건 이후 등장해서 미·중 관계, 중유럽 관계 등 중국의 대외관계를 복원하고 세계무역기구(WTO: World Trade Organization) 가입 등 중국이 국제정치 경제질서의 규칙과 규범들을 수용하고 대외적인 이미지를 제고하는 정책을 추진한 바 있다. 제4, 5세대 그룹 역시 이전 세대의 외교정책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데, 이들의 외교정책 인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은 국제사회에 편입하여 국제체제에 순응하는 국가임을 지속해서 표명하고 있다. 중국은 '선량한 세계시민'으로서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을 지지하고, 환경, 빈곤, 마약, 난민, 테러 등 세계적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것이며, 미국의 이해관계에 도전하는 세력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발전추세이며, 중국은 세계의 안정과 평화에 위협이 아니고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미·중 관계는 중국 외교 전략의 핵심적인 과제이기에 우호적인 미·중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국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과제이다. 미국의 대중국봉쇄정책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미·중 간의 갈등은 양국과 주변국들의 경제 및 안보 이해관계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양국이 공동 이해의 폭을 넓히고, 갈등을 줄이며, 협력을 증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공통의 경제적 이익이 미국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추가) 
천안문 사건: 1989년 6월 4일 새벽에 민주화를 요구하며 베이징의 천안문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학생 노동자 시민들을 중국공산당이 계엄군을 동원하여 탱크와 장갑차로 해산시키면서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 당시 중소정상회담을 취재하러 왔던 많은 외국 기자와 CNN 방송을 통해서 해외로 알려지면서 중국은 국제사회의 비난에 직면하고, 미국과 서구로부터 경제제재를 받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자오쯔양이 물러나고, 당시 상해시 당서기였던 장쩌민이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방: 중국 공산당 정권 수립 이후 문화대혁명 기간에 이르기까지 당원, 국가 공무원, 도시 학교 학생들을 농촌과 공장에 보내 노동에 종사하게 한 국가 차원의 운동. 정신 노동자와 육체노동자의 경계를 허물고 지식인 집단이 낙후된 변경 지방의 농촌 근대화에 참여하고 관료제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하여 독려했다. 그러나 전문적인 지식인 계층의 부재를 야기하여 중국 현대화의 커다란 장애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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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말 중국 국영방송(CCTV)은 '대국굴기(大國崛起)'라는 제목의 자체 제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하였다. 강대국의 부상을 다룬 이 프로그램은 마르크스주의, 자본주의 혹은 노동자계급 투쟁 등에 대한 어떤 용어도 사용하지 않으면서(이러한 이유로 국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탈 이데올로기적 시각으로 강대국을 국가별로 냉정히 조명하면서 수백만 시청자의 시선을 끌었다. 이 프로그램은 강대국화의 조건으로 강력하고 통일적인 국가(포르투갈, 독일), 개방적인 무역(네덜란드, 미국 등), 발명과 특허(영국), 외부 세계에 대한 개방적 태도와 학습열의(일본), 강력한 국가정체성과 문화(프랑스), 정부의 책임 있는 재정정책(프랑스), 교육(독일), 침략적 팽창주의 교훈(독일, 일본) 등의 요인과 함께 '사상해방'을 강조하였다. 이 프로그램이 다루고 있는 경제 대국의 조건은 “어떤 종류의 강대국이 될 것인가”라는 중국의 열망과 진지한 고민을 반영하고 있는데, 사실 이 주제는 중국 외교의 평화적 부상 전략과 관련하여 3년 전 공산당 정치국 회의의 토론 주제이기도 하였다. 강대국화의 도정과 함께 이 프로그램은 다른 한편으로 두 개의 세력을 상대로(다분히 의도적으로) 21세기 중국 외교정책의 방향을 시사하고 있다. 그 하나는 중국 내 민족주의 성향의 강경파들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위협론의 진원지라 할 수 있는 미국이다. 대국굴기에서 제시된 강대국 흥망성쇠의 반면교사를 강경파들에게 시사하고 중국의 평화적 부상 의사를 미국에 전달하려는 것이다. 2011년 1월 19일 개최된 미·중 정상회담은 중국의 강대국으로서의 부상을 국제사회에서 공인받고 본격적인 G 2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미국과 중국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기초한 현안들을 이미 미·중 전략대화의 틀에서 다루고 있었는데, 2008년 세계 경제 위기가 초래한 국제정치경제 질서의 변화 과정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워싱턴에서 만나서 서로를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양자관계로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G 2시대의 개막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영국의 뒤를 이어서 국제정치의 리더십을 행사하는 국가로 등장 한 이래 약 60여년 만에, 국가라기보다는 '문명'이라고 종종 지칭되는 중국을 국제사회를 운영하는 공동의 파트너로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으로 시작된 몰락과 분열 및 침탈과 전쟁 등의 역사적 굴곡을 딛고, 약 한 세기 반 만에 세계사를 주도하는 국가로 다시 등장하였다. 이 회담에서 합의된 양국의 공동성명은 41개의 항목에서 미국과 중국이 상호존중과 공동이익을 바탕으로 한 협력적 파트너십의 구축, 21세기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안정과 번영, 한반도 비핵화 등을 위한 노력에 합의했다. 미·중 양자 간 안보와 무역 불균형 문제 등 현안뿐 아니라 환율 절상을 포함하여 글로벌 차원의 경제 및 기후 환경문제와 지역 안보협력의 문제 등의 의제도 논의되었다.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논의한 글로벌 차원의 경제, 안보, 인권 및 환경 등의 의제들은 미래의 세계사와 국제사회가 이 두 국가의 경쟁과 협력, 갈등과 화해 등의 반복되는 패턴의 결과로 그 운명의 향배가 결정될 것임을 예견하고 있다. G 2시대 미국의 공동 파트너가 된 중국의 외교정책을 이해하는 것은 21세기 국제질서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선결 작업이 된다. 사실 20세기 후반의 50여년은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시진핑(習近平)으로 이어지는 권력승계와 함께 점진적이고 중요한 중국 외교정책의 변화를 목도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국제정치 이론적인 측면과 아울러 21세기 중국의 외교 행위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지구적인 차원의 경제, 안보 및 문화 등 수많은 영역의 국제 레짐과 다자간기구에 중국의 참여와 연루는 확대되어 왔다. 따라서 중국 외교정책의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국의 관료기구와 전문가는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중요한 외교정책의 결정 권한은 소수의 핵심 지도자 그룹에 여전히 남아 있지만, 투입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다양한 국내적 · 국제적인 요인들이 증가하였다. 국가이익과 현실주의적 관점에 근거한 대전략이 새롭게 정식화하고, 다른 교육적 · 경험적 배경을 갖는 새로운 세대의 엘리트 리더십이 부상했으며, 물질적 구조 외에 규범이나 지식 등이 중요시되는 새로운 국제환경에 둘러싸이고 있다. 대만 문제와 같은 주권 및 영토 문제와 현실주의적 사고 등 중국 외교정책의 변화하지 않는 지속성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중국이 국제체제에 편입하면서 그 제약조건에 순응하면서 대응하고자 했던 변화의 폭과 내용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이러한 변화의 폭과 내용을 검토하고 21세기 중국의 외교정책을 예측하기 위하여 몇 가지 질문들을 제기할 수 있다.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얼마나 배웠는가? 외교정책의 관료적 구조와 정책 결정 행위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직업주의, 다양화, 분권화, 세계화 등은 중국의 외교정책과 결정 과정에 어느 정도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국제체제의 외부적 충격과 국내 정치의 상관관계는 어떠한가? 혁명을 경험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에서 기술관료로의 권력승계가 외교정책에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경제, 정보, 안보, 기술 등의 상호의존시대가 중국 외교정책 형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인식공동체(epistemic community)는 정책 결정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중국 외교정책의 변화가 한국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21세기 중국 외교정책의 변화요인들을 검토하기 위하여 우선 중국 외교정책의 선택을 제약했던 국내외적 환경요인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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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는 21세기 들어 외교·안보 분야에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구축하고 일관성을 가진 행위자로서의 역할 수행을 위한 제도적 기반 구축을 꾀함으로써 국제정치의 주요 행위자로 부상하고 있다. 이제 21세기 국제질서는 더 이상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가 아니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탈냉전 시대의 유일 초강대국으로 군림했던 미국의 독주는 이제 막을 내리고 있다. 아직도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위상을 구축하고 있음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독단적인 리더십은 더 이상 발휘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라크전쟁의 수행과정에서 미국은 외교·안보적 위신이 실추됐을 뿐 아니라, 2008년도 전 세계를 강타한 글로벌 경제 위기의 진원지가 됨으로써 국제경제의 주춧돌의 역할 또한 의심받고 있다. 미국 독주체제의 종언, 그리고 중국의 부상, 인도의 성장, 남아메리카의 결속, 유럽의 독자노선 추구 등은 이제 국제사회가 다극 체제로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자카리아(Robert Zakaria)는 이런 현상을 일컬어 '나머지의 부상(the rise of the rest)’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미국 패권의 약화, 다극 체제의 출현 등으로 묘사되는 21세기 글로벌 환경 속에서 미국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유형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유럽이다. 유럽은 1950년대 이래 꾸준히 추진되어온 지역통합의 성과에 힘입어 국가 간의 평화, 경제적 번영, 민주정치의 발전, 인권과 법치의 확립을 이루어내면서 국제사회의 모델이자 리더가 되고 있다. 유럽은 미국과 같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미국을 능가하는 인구와 경제 규모,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규범적 행위자로서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국제사회에서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유럽연합은 과거 대서양 중심적 세계관과 대외전략에서 아시아의 중요성에 눈을 돌리고 있다. 중국의 부상, 동남아의 약진, 그리고 한국의 눈부신 성장으로 인해 동아시아가 세계 경제의 성장을 견인하는 기관차 역할을 하게 되면서,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이 유럽연합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이익을 구성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유럽연합에 있어 중요한 경제협력의 파트너이자 가치 동반자의 요건을 모두 갖춘 한국과의 양자 간 협력관계의 발전에 유럽이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더욱이 1998년 동아시아를 강타한 외환위기를 빠른 속도로 극복한 경험이 있는 한국은 작금의 글로벌 경제 위기 속에서도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일본은 오랜 경제적 침체를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중국은 아직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유럽과 공유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역동적 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가진 한 국이 유럽으로서는 매력적인 협력 파트너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EU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글로벌 경제 위기의 여파로 한-EU 간 교역 규모의 상대적 비중이 작아지긴 했지만, EU는 최근까지 중국에 이어 우리의 2대 교역 상대였으며, 한국에 대한 직접투자 규모는 세계에서 부동의 1위이다. EU는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꾸준히 제공하면서도 북한의 핵 문제와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며 한반도 문제에 대한 관심을 지속해서 표명하고 있다. EU는 우리와 민주주의, 인권, 법치, 다자주의 등의 가치를 공유하며 테러와 범죄, 환경과 질병 등의 글로벌 이슈의 해결에 파트너십을 발휘할 수 있는 가치와 이익의 동반자이기도 하다. 경제협력 관계의 증진, 정무 및 사회문화 부문에서의 협력 강화, 글로벌 이슈 대응에 있어서 공조 체제 구축을 통해 긴밀한 협력 파트너로서의 관계를 정립해 가고 있다. 2009년 10월 15일 한국과 EU는 한-EU FTA와 한-EU 기본협력 협정 개정안에 가서명하였다. 무역과 투자의 활성화를 통한 경제적 교류의 증진을 위한 FTA, 그리고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파트너십을 강화하기 위한 기본협력 협정 개정안이 마련됨으로써 한국과 EU는 2009년 5월 서울에서 개최된 양측 간의 정상회담에서 천명했던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상호관계를 격상시키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한국은 6개 EU 창설국가들과 1962년 수교를 완료하고, EU와는 1963년 7월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래, 한국과 EU의 상호관심사는 그동안 주로 경제문제에 집중되어 왔다. 하지만 1990년대 이래 북한의 핵 문제와 인권 문제 등이 부각되면서 EU의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 증대되었고, 2010년에는 한-EU 간에 전략적 동반자 관계가 구축되면서 양자 간의 정치 및 안보 관련 쟁점에서도 협력관계가 발전하고 있다. 한국과 EU의 관계가 꾸준히 강화되고 있음은 양자 간 공식 대화의 채널과 빈도가 그동안 지속해서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특히 2001년 4월 1일에는 한국과 EU 사이에 정치, 경제, 문화 등 포괄적 협력을 가능케 하는 한-EU 기본협력 협정(Framework Agreement on Trade and Cooperation)이 발효됨으로써, 지난 1963년 외교관계 수립 후 주로 통상에 국한됐던 한-EU 관계가 무역 외에 정치, 경제, 문화, 연구개발 등 다양한 분야의 전반적인 협력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한국과 EU 사이의 교역과 협력에 새로운 틀을 마련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이 기본 협정은 지난 1996년 한국과 EU 사이에 체결되어 우리 측은 1999년 4월 국내 비준 과정을 모두 마쳤으나, 유럽의회와 EU 회원국이 한국의 인권 및 노동상황 등을 문제 삼아 비준을 미루어 정작 협정을 체결하고도 4년 이상 발효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99년 1월 유럽의회가 한국의 인권 및 노동 상황이 충분히 개선되었다고 평가하면서 이 협정을 비준하게 되었으며, 이어서 회원국들의 비준 과정으로 들어가 2001년 1월 31일 아일랜드가 EU의 회원국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비준 절차를 완료함으로써, EU 이사회의 최종 승인을 받은 후 2001년 4월 1일 발효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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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의 외교정책을 논하기에 앞서, 과연 EU가 외교정책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외교정책이란 일반적으로 한 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국경 바깥의 행위자들과 상호작용을 함에 있어 취하는 행위를 일컫는다고 한다면, EU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2015년 현재 총 28개 국가로 구성된 연합체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외교정책의 주체인 국가와는 크게 성격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EU는 하나의 국제기구인 것이다. 그런데도 EU를 외교정책의 주체로 표현하는 것은 EU가 보통의 국제기구와는 질적으로 현저히 다른 성격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1. EU의 발전 과정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강력한 지원과 고무 하에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의 설립으로 초석이 다져졌던 유럽통합은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EEC: European Economic Community)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European Atomic Energy Community)의 창설로 이어졌고, 이후 3개의 공동체를 통합하여 유럽공동체(EC: European Com-munity)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러나 1965년 회원국, 특히 프랑스의 이해관계와 EC의 초국가적 기구인 집행위원회와의 갈등이 심화하면서 이른바 '빈 의자의 위기(empty chair crisis)'로 불리는 진통을 겪게 되고, 이후 198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유럽통합은 침체기를 맞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관세동맹의 완성, 유럽의회의 직선제 도입, 유럽통화체제(EMS: European Monetary System)의 출범 등 후일 통합의 가속화에 기반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정책, 판결, 제도적 장치의 마련을 통해 꾸준히 발전해왔을 뿐만 아니라, 설립 당시 프랑스, 독일, 이태리,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6개국으로 출범한 EU는 여러 차례의 확대를 거쳐 2015년 기준 28개국을 거느린 대식구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특히 EU는 1986년 단일유럽법안(Single Euro-pean Act)의 채택을 계기로 상품, 용역, 자본, 노동 이동의 완전 자유화를 지향하는 1992 계획을 착수하게 되었고, 1992 계획의 추진에 관련된 의사결정에 가중다수결 제도를 도입하면서 유럽통합의 침체기를 벗어나 부흥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후 EU는 사회정책, 지역개발정책 등으로 관할영역을 점차 확대하게 되고, 1991년 12월 네덜란드의 도시 마스트리흐트에서 체결되어 1993년 11월 1일을 기하여 발효된 유럽연합조약은 기존의 유럽공동체를 재편하여 이른바 '세 기둥(three pillars)'으로 구성되는 EU를 창설하였다. 세 기둥이란 경제통합에 초점을 맞춘 초창기 세 공동체의 통합체로서의 유럽공동체(European Communities)와 새로 신설된 공동외교안보정책(CFSP: Common Foreign and Security Policy)과 사법 및 내무 분야에서의 협력을 일컫는다. 유럽연합조약의 전문에서 회원국의 정상들은 EU의 목적이 "유럽의 국민들 간의 더 긴밀한 통합(evercloser union)의 창출 과정에 있어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데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1980년 후반 이후 진행되어온 지역통합의 이러한 일련의 단계들은 유럽의 대내외적인 국제정치 환경에 중요한 변화를 수반하고 있다.
2. EU와 국제기구와의 차별성과 국가성
이처럼 '확대'와 '심화'를 거듭해온 EU는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차원에서 기존의 여타 국제기구와는 매우 다른 면모를 갖춰 오고 있다. 물론 EU가 비록 '유럽 연방국(United States of Europe)'으로 불릴 수 있는 수준의 하나의 국가로까지 발전된 것은 아니지만, 국제 레짐 또는 일반적인 국제기구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통치구조를 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예컨대 "EC는 새로운 국가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은 아직 아니지만 국가 간 협력의 수준은 넘어선, 즉 국가의 형성과 국제협력의 두 수준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EU와 다른 국제기구와의 차별성은 여러 측면에서 발견된다. 그 예로써는 우선 EU의 예산이 이른바 자체 재원 조달체제에 따라 조성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EU의 자체 재원 조달체제는 i) 역외국가로부터의 수입품에 대한 관세(tariffs), ii) 수입농산물에 대한 가변부과금(variable levies), iii) 회원국이 징수하는 부가가치세의 일정부분, iv) 각국의 GDP 수준에 따라 책정된 액수를 회원국이 EU 예산에 공여하게 되는 제4의 재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EU의 자체 재원 조달체제는 예산 조달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EU가 여타 국제기구와는 질적으로 다른 실체임을 증명하는 예가 된다. EU가 기타 국제기구와 질적으로 다른 면모를 보이는 또 하나의 예는 EU법의 직접 효력성과 회원국 국내법에 대한 EU법의 우위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직접 적용성이란 EU법이 국내 이행 입법의 도움 없이 그 자체로 국내 법질서의 일부를 형성할 때 발생한다. 즉 조약의 국내적 도입을 위해 변형 조치가 요구되지 않는 경우, 그 규정은 직접 적용성이 있다고 한다. EU의 경우 회원국 국내에서의 비준 과정을 거쳐야 하는 조약의 개정 등을 제외한 EU의 의사결정기구를 통해 내려지는 일상적인 결정들은,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회원국 정부가 국내에서의 심의와 수정, 또는 동의 절차를 거칠 여지가 없이 거의 자동으로 적용이 된다는 점에서 EU법의 직접 적용성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회원국의 의회가 고유권한인 입법권의 상당 부분을 EU에 양도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EU법의 우위란 EU법과 회원국의 국내법 사이에 모순이 발생하였을 때 EU법이 우선성을 가짐을 의미하며, 따라서 EU법과 충돌하는 국내 법은 개정이 요구된다. 사실 EU를 구성하는 조약에는 EU법의 우위성을 명시하는 조항이 마련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여러 차례에 걸친 판례에서 행해진 유럽사법재판소의 적극적인 조약 해석에 힘입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EU법의 우위성이 점차 확고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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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냉전 이후 일본의 안보 정책 역시 적극적인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일 안보 체제의 재정의를 통해 새로운 위기 상황에서 미군과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제도적 근거를 마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충하고 자위대의 활동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중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고 동아시아 안보 질서에서의 역할 확대를 모색해 오고 있다. 1995년의 방위계획 대강으로 자위대의 활동 범위는 본토 방위를 넘어 주변 지역의 유사(事)사태에의 대응으로까지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위대의 해외 파견의 길이 열렸다. 나아가 2004년 판 방위계획 대강은 방위 정책의 기본 목표로서 일본의 방위 외에 국제적 안보 환경의 개선을 추가함으로써, 자위대의 임무를 일본방위 및 주변 지역 활동을 넘어 국제무대로까지 확대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는 냉전기 안보 정책의 핵심이었던 전수방위 원칙이 탈냉전 이후 유명무실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미일 안보협력 역시 시대적 상황에 맞게 재조정되었다. 일본의 안전보장 확보라는 관점에서 보면, 미일 안보 체제의 본질적 의미는 냉전의 종결에 의해 변질하였다거나 그 중요성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즉, 소련이라는 잠재 적국의 소멸이 바로 일본의 안보 불안 해소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1993~1994년의 북한 핵 위기나 1996년의 대만해협 위기는 불안정한 동아시아 지역의 안보 상황을 여실히 보여 주었고, 미일 동맹은 이러한 새로운 안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안으로 간주하였다. 1996년의 미일 안전보장 공동선언을 통해 양국은 미일 안보 체제가 21세기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안전과 번영을 유지하기 위한 근간임을 확인하고, 미일 동맹의 대응 범위를 '필리핀 이북의 극동'에서 '아시아·태평양지역으로 확대했다. 이러한 '동맹의 광역화'에 따라 1997년에는 미일 간의 구체적인 협력 강화 방안을 규정한 신미일방위협력 지침(이른바 신 가이드라인)이 확정되었고, 1999년에는 이를 근거로 일본 주변 지역에서 유사 사태가 발생하는 경우를 상정하여 자위대의 역할을 규정한 주변 사태 법이 제정되었다. 또한 9·11 테러 이후 고이즈미 내각은 미국의 대테러전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테러대책특별조치법, 유사법제, 이라크지원 특별조치법 등이 제정하고, 이를 근거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등지에 자위대를 파견하여 미일 안보협력 관계를 공고히 했다. 9·11테러 이후 해외 주둔 미군의 재편이라는 미국의 글로벌 방위전략에 맞추어 미일 안보 체제는 재편·강화되어 왔다. 2010년대 들어 미·중 간의 경쟁 구도가 가시화하고 중일 간 전략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미일 간에 중국 견제를 염두에 둔 안보협력이 가속했다. 일본에서 보수계 언론과 안보전문가를 중심으로 중국의 군사적 부상에 대응하여 미일 동맹을 강화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집단 자위권이 불가결하다는 주장이 강해졌다. 즉, 일본이 집단 자위권을 행사할 수 없는 한, 미일안보조약은 미국에 대한 일본의 기지 제공과 미국의 일본 방어 의무를 맞바꾸는 비대칭적인 동맹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2014년 7월에 일본 정부는 각의 결정을 통해 집단 자위권을 용인하는 헌법해석 변경(해석개헌)을 단행하였다. 집단 자위권의 행사 용인은 전후의 일본 방위 안보 정책의 기본인 '전수방위' 원칙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2015년 9월에는 집단 자위권의 행사를 전제로 하는 11개의 안보 관련 법안이 성립하였다. 그중에서 무력 공격사태 법 개정안은 제3국에 대한 무력 공격 일지라도 '일본의 존립이 위협받고 국민의 권리가 근저로부터 뒤집힐 명백한 위협이 있는 경우'를 '존립 위기 사태'로 규정해 자위대가 무력 행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반도 유사시의 미군의 후방 지원을 상정한 현행의 주변 사태 법을 대체하는 중요영향 사태법안은 '방치할 경우 일본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태' 시에는 전 세계 어디서나 자위대가 미군 등 외국 군대를 후방 지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기존의 주변 사태 법에서 '일본 주변'에 제한되던 후방지원의 지리적 제약이 제거되었다. 2015년 4월 말에 미일 양국은 미일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을 개정하였는데, 그 핵심은 일본에 의한 집단 자위권 행사를 전제로 미군과 자위대 간의 역할 분담을 재조정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일안전보장협의위원회(이른바 2+2)에서 합의된 미일 동맹의 발전 방향에는 자위대와 미군의 공동 대응 역량 강화 차원에서 공동 훈련 · 연습의 확대, 시설의 공동사용, 우주 및 사이버 분야를 포함하는 정보공유 및 공동의 정보수집 · 정찰 활동의 확대 등이 포함되었다. 향후 미일 양국은 미일 동맹의 글로벌화 및 중국의 군비증강과 해양 진출에의 대응을 염두에 두고 미군과 자위대 간에 병력 운용의 통합을 가속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일본 정부는 현행헌법을 그대로 두면서 집단 자위권에 대한 해석을 변경하고, 미일 가이드라인을 개정하고 안보 관련 법규를 정비함으로써 군사적 의미에서 '보통 국가'가 되었다. 즉, 자국이 공격받지 않더라도 제3국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자위대를 파견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로써 미일 동맹의 '글로벌 동맹화'를 향한 제도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미일 안보 체제는 냉전기에는 일본방위와 주변 지역에서 유사 사태가 발생할 경우의 일본에 의한 기지 제공을 내용으로 한 데 비해, 탈냉전 이후 특히 21세기에는 중국의 해양 진출과 주변 사태에의 대응 및 글로벌 차원의 안보 환경 개선을 위한 공동 대응을 가능하게 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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